배란일인가.
사소한 것에도 감정이 들쭉날쭉하다.
컨트롤 할 수 있었고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 즉 덮어놓고 생각했었던 일들도 다시 꺼내어 눈물짓는다.
그래도 지금은 혼자 있으니까, 혼자만의 시간이니까 맘 놓고 울어야지.
이 때 울지 않으면 언제 울으리.
다이어리를 찾았다.
작업 공구박스 앞주머니에 들어있더라.
얄궂게도 나는 어제 새 다이어리를 샀을 뿐이고. 하! 나참.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까지 다 그 가방 안에 있었다.
신규 장비 설치는 재미있었다. 나름 밤새워 보고간 자료는 오늘도 얼기설기였음이 드러났지만, 그거라도 보았기에 수월하게 적응했다. 비록 비용대비 효율은 낮았을지라도... 다음 설치 작업 때는 더 높은 효율로 작업계획서를 만들어야지. 현실에서 눈으로 보며 내 손으로 만지는 게, 자료보다 더 눈에 빨리 들어오더군.
오늘은 생각보다 사람들이 내게 다정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고, 나만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고...
부장님은 벌써 혼자 나가서 업무보고 장애보고서까지 쓴다며 칭찬도 하시고, 내 장비도 이것 저것 챙겨주시고, 심지어 나갈 때 USB 가져가라고 직접 건네주셨다. 차장님도 이케저케 여전히 장난치시는데 그냥 호의로 그러시는게 보인다. 심지어 한 때 잠시 스크래치를 주셨던ㅠㅠ 선배님도 오늘은 이모저모 칭찬을 많이 해주시더라.
휴식 시간에도 관심 많이 가져주시고... 뭔가 신기했다.
아침에 매니저 분이 전화하셔서 내 장애보고서 내용이 미흡하다며 여러가지 피드백을 주셨는데 그것도 역시 감사했다. 다만 그렇게나 부족한 내용이었다면 상황을 더 잘 알고 있는 시니어님과 부장님은 왜 내용 상의 피드백은 없으셨는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보고서였다고 생각하겠다. 매니저님이 말한 플로우는 솔직히 매우 짜임새 있고 좋았고, 현장에 안 계셔서 분석에 조금 차이가 있으셨을 뿐이다.
나는 이 세 분 각각의 피드백을 귀 담아 들으려 노력했고, 신입에게 이렇게 해줄 정도의 정성에 감사했으나
오랜만에 만난 내 이전 사수님은 이 얘길 듣고 계속 그 고객사에 있었다면 아마 피어나는의 자리에 내가 있었을 텐데, 생각만해도 싫다고 말했다. 고객이랑 이틀 동안 장애분석으로 실랑이하고, 보고서 쓰고, 거기에 각기 세명에게서 피드백을 따로 받는다고! 인 것이지.
사실 나도 세 사람이 각자 무조건의 호의, 나에 대한 애정으로 그렇게 해줬다고 100%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느꼈었다. 싫거나 무관심하면 이 정도라도 해주리.
내가 너무 상황을 좋게만 보나.
돌아오는 길.
프로젝트 얘기가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그 분은 많이 배우시겠어요. 타자가 독수리라고 하기에, 프로젝트 끝나면 열손으로 칠거에요~ 라고 말했다. 사실 관리할 장비가 그렇게 많은데 독수리 타자로는 매우 어려울테니.
이전 사수님은 미안했는지, 내가 피어나는 이름을 먼저 이야기 했지만 고객이 거절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어요, 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다. 왜 거기서 '여자는...?'하고 물었을지.
그냥 내가 누구고, 뭘 할 줄 아는지 말했겠지. 내가 '여자'라는 걸 넌지시 표명한게 아니라. 처음부터 내가 얼마나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은지에 관계없이, 사수는 나를 데려가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게 대체 어느 방면에서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일을 빠릿빠릿하게 못하나. 내가 스킬이 너무 모자랐나. 불성실했나.
그 동안 보아온 내가 어떻길래,
사수님의 그 말에 오히려 더 울고 싶었다. 택시 안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뒷자석에서 혼자 눈물이 나올 것을 참고 있었다. 대신에 나는 많은 것을 물어봤다. 내가 궁금했던 것들.
이 신규 장비가 설치 되면 앞으로 무엇이 진행되는지, 거기엔 누가 참여하는지, 각각의 기간은 얼마나 예상되는지, 테스트 시나리오에는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사수님도 자세하게 대답해주셨다. 장비를 설치했으니 11월까지 OS를 깔고, 기본 데이터를 가져온 후엔 개발팀에서 개발자들이 어플리케이션을 만들고 운영 테스트 해볼거라고. 그 기간이 대략 3월까지 예상하나 6월까지 더 연장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이후 가용성 테스트와 기타 테스트를 거쳐 추석에 마무리될 수도 있다고.
재미있게 들렸다. 테스트엔 여러개의 시나리오들이 있고,그 모든시나리오에 예상된 플랜대로 모든 장비가 반응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300대가 넘는 장비에 매일 같은 명령어를 치고 있겠지만 대신 대리석에 끌로 글씨를 새기듯 그 명령어는 잊혀질 일이 없을 것이다.
재미있겠어요, 그 프로젝트 끝나면 명령어를 잊을 일이 없겠네요, 라고 말하자 사수는 이렇게 말했다.
피어나는 에게도 좋은 기회가 올거에요. 17년엔 청라지구로의 이전이 있어요. 센터를 옮기는 것이라 규모가 매우 클 것이에요. 나는 그 프로젝트에서 빠지겠지만.
내 귀에는 그 말마저 끝내 어떤 프로젝트에도 나와는 함께 일할 의사가 없다는 말로 들렸다.
나는 같이 일하기 싫은, 일 못하는 사람이라고 끝끝내 단호하게 말하는 것 같아서 서러웠다.
홀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울고 싶었지만 민폐일까봐 참았다.
방 안에 혼자 앉아 끄적이는 지금은 울기엔 얼마나 자유로우냐.
내 한계에 대해, 내 수준에 대해, 스스로 자신감을 잃어간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그만치 주장했던 프로젝트에도 사수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기회는 언제나 찾아오는 것이 아닌데 왜 그것을 놓쳤을까. 내 무엇이 잘못되었길래.
한편으로는 인생에 이만한 일 하나로 아직도 훌쩍이는 내가 한심스럽고 걱정된다.
이런 가짐으로 어떻게 살아남으려 하는가?
나를 사랑해주고 인정해주려면, 자부심을 가지기엔 오늘과, 최근은, 힘들구나.